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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가볼만한곳 장릉 소년왕 단종 이 잠들어있는곳이죠. 대한민국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단종이라는 그명칭은 누구나 들어봤을것이고 어린나이에 삼촌에게 죽임을 당한 안쓰럽기만한 한이깊은 왕이었는정도로 알고 있을거에요. 그렇지만 단종이 어디에 묻혔는지, 어디에서 죽임을 당했는지는 의외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더라구요. 이는 우리나라 역사가 교육이 주입식교육에 시험위주로 가르쳐지다보니 달달외우는 역사교육에 시험시기만 지나면 싹 잊혀지기에 그렇다고 보여지는데요. 영월이라는곳이 서울 수도권에서 3시간이상가는 거리라 그리 녹록한 거리는 아니지만 영월에가면 꼭 가봐야할 열월가볼만한곳 이자 역사적장소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왕들이 잠들어있는 능들은 국가적으로 잘 관리되어 숲이 우거지고 보존이 잘되어서 굳이 역사적장소를 간다는 의미보다는 가족 친지 연인들과 여행지로, 산책코스로 가기 좋은곳이죠. 저는 숲을 워낙 좋아하기때문에 여행을 가면 그주변에 유명사찰은 기본이고, 인근에 왕릉같은 곳이 있으면 꼭 들르는 편이죠. 영월가볼만한곳 장릉 은 조선 제 6대왕으로 재위기간은 불과 3년에 불과한데요.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존경에 맞이않는 세종대왕의 손자이자 그의 아들 문종의 장자로 태어나 문종이 즉위한 그해에 바로 오아세자로 책봉된 임금이죠. 그러나 부왕인 단종이 안타깝게도 즉위 2년만에 승하하자 불과 12살의 나이로 즉위를 하였죠. 그러나 권룍야욕이 강했던 숙부 수양대군이 즉위 이듬해에 한명회, 정인지 등과 모의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등의 가신을 척살하고 정권을 잡죠. 이후 3년만에 수양대군의 협박과 음모에 못이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게됩니다.

하지만 어린 소년왕 단종 을 상왕에서 그리두지 않습니다. 1456년 너무도 잘아는 단종복위운동인 사육신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성삼문, 이개등 사육신이 처형당하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그때 당시 천혜의 유배지인 영월의 청령포로 강제 유폐되게 되죠. 영월로 가는길은 멀기도 험하기도 한 힘든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귀양길에 수행하는 나졸들은 먹을거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하니 세조와 그 일파들의 악랄함이 집작이 가는듯하네요.  유폐된 그해 또다시 또다른 숙부인 금성대군이 단종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무위에 그치고 세조는 단종 에게 종사에 죄를 물어 서인으로 폐하는 동시에 사약을 내리게 되니 17세에 어린나이에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소년왕 단종이 죽임을 당한 방식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이 없으나 정사인 세조실록에서는 스스로 목을메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서인 전화적책, 병자록에서는 살해되어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금부도사 왕방연이 어명을 받아 사약을 가져갔으나 차마 어린단종임금에게 주지못하고 망설이고 있을때 한 관원이 활시위로 목을 졸라 살해 했다고 되어있다죠. 아무래도 정사인 세조실록은 임금위주로 기록되어 진 승자의 기록이라고 볼때 여러 정황상 살해된것이 맞다고 보여지는데요. 이는 다른 일화에서도 알수 있는데요. 보고계시는 사당은 영월호장 엄흥도의 충절을 널리 알리기 위해 1726년에 세운 비각인데요. 엄흥도는 살해된 단종을  그대로 두었다는 기록과 강물에 버려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찌됐든 방치된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있어 누구나 거두길 꺼려했으나 엄흥도는 가족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장릉이 있는 동을지산에 암매장 했는데 다급한 마음에 노루한마리가 앉아있던곳에 암매장을 하였는데 이는 노루가 앉아있던터라 그곳만 눈이 쌓이지 않아 그것에 매장했는데 이곳이 풍수지리가들에 의하면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네요.

영월가볼만한곳 장릉은 작은규모의 왕릉이지만 세종의 영릉과 함께 비교적 원형이 잘보존된 곳이라고 해요. 그렇게 한많은 생을 마감한 단종은 중종때에야 그무덤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고 그리고 한참후인 숙종7년 단종이 살해된이후 224년만에 다시 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다시 1698년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하고 능을 장릉이라하며, 비로소 종묘에 부묘하였다고 합니다. 숙종은 단종을 복위후 여러편의 왕이직접지은시도 지었다고 하는데 애절한 시도 한번 찾아보시구요.

장릉은 다른곳에 왕릉과 다른 여러 특징이 있는데요. 단종에 제사는 한식날에 지냈는데 지금은 향토문화제로 바뀌어 단종제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거행이 되구요 영월에서 가장 사람이 모이는 날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정자각과 능이 날일자로 되어있는것인데 제각을 가는길도 직진하여 오른쪽으로 꺾어들어가게 되어있고 왕릉또한 우측을 바라보게 되어있네요. 예전 관례로 보면 원래는 조선의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밖을 벗어나지 않게 조성되었으나 그에 반하는 유일한 왕릉이구요. 보통에 왕릉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해있으나 장릉은 높은 언덕 산줄기에 잡리잡고 있는게 특징이죠.

단종릉을 가는 산능성이길인데요. 소나무숲사이를 산책하듯 걸어갈 수가 있어요. 능은 남쪽인 서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자세히 보시면 능을 둘러싼 소나무들이 마치 단종릉에 절하듯이 가지듯이 틀어진것을 볼 수있는데요. 능에 가까이 가져서 보시면 무신석이 없고 문인석만 있는것을 알수 있답니다. 보통은 문인석이 왕릉가까이에 그아래 무인석이 자리잡고 있죠. 이는 무인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에 무인석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네요.

 

 

보시는것처럼 사람처럼 보이는 석물이 문인석밖에 보이는 않아요. 단종하면 또 한분을 생각할 수있는데요. 바로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이지죠. 사실 정순왕후는 단종비보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더 유명하죠. 단종2년에 수양대군의 명으로 가례를 올리게 되는데 당시 14세인 단종보다 한살위였고 결혼한지 1년만에 왕위를 뺴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나니 의덕왕대비가 되는데요 어찌됐든 조선의 최연소 왕대가 되는 셈이죠. 이 노산군으로 강등후 군부인이 되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됨에 따라 생이별을 하게되는데요. 아버지인 송현수가 세조의 친구였는데 처음 사육신사건으로 연루되었을때는 무마를 시켜줬으나 두번째 금성대군 복위운동때도 적발되어 관노로 되었다가 결국 교살되었다고 하니 남편과 아버지가 함께 죽임을 당했으니 얼마한 한 맺힌 삶이며, 어린나이에 기댈곳없이 가슴을 치고 살았었음을 짐작케하죠.

정순왕후는 세조가 내려준 집과 재물을 거부하고 평생 흰옷에 고기과 생선을 멀리하고 살았는데 그 궁핍함이 오죽했으면 주변 여인네들이 도와주어 연명을 했다고 하녀요. 그렇지만 이런 한많이 생이지만 60여년의 질긴 생을살았고 역대왕비중 두번째로 장수한 82세로 생을마감했다고 하니 아마도 일찍 세상을 떠난 단종임금의 삶까지 살지 않았나 싶네요. 죽어서도 묻힐땅이 없는 신세였는데요 단종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경헤공주의 시댁에서 한자리를 빌려주어 겨우 안장될 수 있었다하네요. 이후 단종복위와함께 단종을 평생생각한다는 뜻으로 사릉이라는 능호가 내려졌고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읍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지금도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아쉬움을 달래기위해 사릉에 소나무를 가져나 이곳 장릉에 가져다 심어놓았다고하는데 찾아보질 못했네요. 다만 땅을 마련해준 해주정씨가문과 전주이씨종약원에서 함께 제사를 치뤄주니 일년에 두번에 제사를 받는 죽어서 제대로 위로를 받는 셈이 되었네요. 이제 이틀남은 연휴 강원도쪽에 계시면 영월장릉에 한번 들러보시고, 수도권에 계시면 사릉으로 나들이를 떠나보세요 사릉은 전통수목양묘장으로 지금은 사용되어 야생화도 많아 전국의 문화유적지에 야생화를 공급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니 꼭 한번 가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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